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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밤중 설장구 소리로 김삿갓을 깨우다. 등록일 2023.06.02 13:16
글쓴이 박은숙 조회 29386

한밤중 설장구 소리로 김삿갓을 깨우다





_ 한밤중 설장구 소리로 김삿갓을 깨우다 _
박 은 숙

피곤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여행길에 올랐다. 일박이일동안 함께 할 문우들의 상기 어린 얼굴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호기심으로 젖어있다. 나도 그중 한명의 벗으로 끼어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니, 찌들어 답답하고 억압받던 일생생활에서 탈피하여 오랜만에 밖의 경치에 눈도장 찍느라 여념이 없다.
사월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터덜거리며 정선의 아우라지를 향해 가고 있다. 수양 벚꽃이 축축 늘어진 실개천을 지나 골지천과 임계천이 만나는 곳 아우라지에 겨우 도착하였다.
아침에 비가 많이 와서 다리가 떠내려 가버렸다는 건너편을 바라보니 정선 아리랑을 불럿던 처녀 총각의 애절한 전설이 생각난다. 비가 와서 흙탕물이 휩쓸고 간 자리는 황량하기 그지없고 푸른 잔디도 처녀상도 간 곳이 없다. 임계천과 오대천이 만난자리의 빨간 여송정 밑에 재두루미 한 마리 낮게 날아오른다. 길이 허물어져 구절리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왔다. 맨발로 걸어서 건널것 같은 깊지 않은 물은 맑고 파란 하늘이 담겨 있었다.
산길을 구불거리며 지나다보니 은사시나무와 직송이 가는 길을 안내라도 하듯 반겨 주고 목련의 하얀 꽃잎이 살짝 웃으며 눈인사를 한다. 가수리를 지나 영월에 가는 길에 장능을 바라보았다. 단종의 어린 영혼이 잠들어 있는 그곳은 잘 다듬어져 있었지만 어쩐지 낯설고 황량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는 나그네의 마음이 터져 버릴 것처럼 슬픔으로 다가왔다.
수백 년이 지나도 유배지인 그곳을 한걸음도 떠날 수 없어 죽어서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단종의 영혼을 생각하니 비운의 왕에 대한 기막힌 운명이 안타까웠다. 버스는 비틀거리며 장능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하얀 싸리 꽃이 만발하고 맑은 하늘에는 조개구름이 뒹굴고 있었다. 단종이 귀양 올 때 소나기가 내렸다하여 이름 지어진 소나기재를 넘으니 가까이 청령포가 보인다. 어린 단종의 귀양살이를 슬퍼하던 직송은 신하들처럼 모두 단종의 묘를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강 건너 소나무 숲에 노을이 지며 살짝 어둠이 내리고 단종의 한스러운 마음이 피가 되어 흘렀을 강물은 말없이 흐른다. 우리는 모두 숙연하게 청령포를 바라보다 허접한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가수리에서 물줄기를 만나 조양강이 되고 다시 동강이 된다. 물은 흘러 서울로 내려가고 사람은 서울로 올라간다는 이곳 어라연을 지나 황새여울을 지났다. 고씨동굴을 지나 지금은 탄광 때문에 검은 물이 나온다고 하는 옥류천을 지났다. 우리는 김삿갓 묘를 찾아 가고 있다. 대관령 고갯길을 울퉁불퉁 돌고 돌아 맑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을 지나 산 속으로 들어갔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다리가 없어 들어오기 힘들었다고 담당 교수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산세가 오묘하고 겹겹이 감고 도는 산의 흐름이 과연 천하의 명당중의 명당으로 보인다. 좌천용 우백호를 끼고 있는 높고 아름다운 산자락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절묘한 자리였다. 전쟁이 나더라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곳은 심산유곡 천하의 요새로 보였다. 배만 감추어놓으면 동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것 같은 요새였다.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흙길은 차가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좁게 다듬어져 있었다. 길가에는 들풀과 야생화가 피어있고 아직 인간의 때가 덜 묻은 너무 자연적이고 서민적인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드디어 김삿갓 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머잖아 사람들은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전부 파헤치고 파괴해서 도시적이고 인위적인 자연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 이다.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선천 방어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함으로써 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그를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나이 스물이 되어 결혼한 그해 시골에서의 백일장을 보게 되는데, 과제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찬양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한탄하라는 시제였다.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어머니로부터 사실을 알고 난 후 출생을 비관하여 평생 동안 김삿갓이라는 예명으로 전국을 떠돌며 시를 짓고 세상을 비판하고, 방관하는 자세로 살아온 그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방랑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그의 나이 쉰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와 장사 지낸다.
영월 와설리에 그의 생가 터와 묘지가 있다. 김삿갓의 방랑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건달인 첫째 아들은 내버려 두고라도 열심히 살고자 하는 둘째 아들의 익균의 끈질긴 숨바꼭질 인생의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유골을 거두어 이곳에 묻었다고 하니 놀라운 집념이고 천하의 효자였다.
이곳이 영월의 노루목이다. 김삿갓은 화순군 동북면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둘째 아들 익균이 영월 노루목에다가 묻었다고 한다. 김삿갓 묘를 감상하기에는 도착시간이 어둑어둑한 초저녁이라 우리는 내일로 미루고 저녁식사부터 해결했다. 산나물과 자연에서 얻은 야채와 정성으로 만들어진 밥상이 들어왔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초가도 아닌 것이 초가지붕처럼 시골 맛을 풍기는 여관 비슷한 집이었다. 이 동네는 김삿갓 묘 하나만으로 충분한 관광지가 된 셈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꼭 한번은 들려 볼 만한 서정적이고 낭만이 흠씬 풍기는 곳이었다.
우리는 식사 후에 교수님들의 좋은 강연을 듣고 나서 마지막으로 설장구 가락과 춤을 한수 보여 주려고 준비하였다.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올리지 말고 깜짝 공연을 하자고 기획하였다. 설마 그분들은 내가 설장구를 하고 있는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저 소설이 좋아 늦게 공부하려 한 학생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나는 소설 설장구를 쓰려고 노력하였지만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이 나이에 학교 갈 생각을 하였다. 늦었지만 문창과정을 공부하다보면 좀 글쓰기가 나아지려니 하고 생각을 하였는데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수십 년씩 글쓰기를 해도 모자라고 어려운데 신인 정도의 실력인 내가 문창 전문가 과정에 스스로 뛰어 들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고 무지한 노릇이었다.
나는 매일 책을 읽으며 문우들 따라가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자료 수집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먹고, 빵과 우유를 손에 들고 걸어 다니면서 먹어 치웠다. 집에는 거의 밤 열두시가 넘어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가족들 몰래 밤새우며 다음날 제출할 글쓰기 숙제하느라 컴퓨터를 두들겨 댔다. 내용이 부실해도 원래 창작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요상하고 턱없는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많이도 기어 나왔다. 문장이 좀 세련되고 단어가 소설적이고 문학적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탄을 늘어놓으며, 경험 부족과 모르는 글쓰기 기술들을 다른 예술 차원으로 감싸고 변명하듯 자신의 무지를 감추느라 진땀을 흘렸다.
사실 전문가들과 앉아서 소설이나 문학 미학들을 토론한다는 것 자체가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래도 그 틈바구니에서 노력하여 결국 수료하고야 말았다.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이제 계속 노력하여 꼭 설장구를 소재로 하여 소설을 쓰고 말리라 다짐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순간에도 그 생각을 하면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사실 수년 동안 피곤에 찌들었고 과로해서 오지 않으려 했지만, 김삿갓 묘에 들린다는 말에 마음이 변해서 이 번 여행을 따라왔다. 나를 아는 문우들의 부탁으로 공연을 위해 무거운 장구까지 들고 따라왔으니 참으로 피곤하고 나른하다.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하여 공연을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힌 생각이었다.
문인들이 아니면 감히 상상도 못할 생각이 아닌가 한다. 깜깜한 한밤중 그것도 기가 흐르는 명산에서 걸출한 시인 김삿갓 묘에서 설장구를 하다. 탄복할만한 솔깃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언제 내가 또 이런 공연을 해볼 수 있겠는가? 그동안 설장구 연구하며 글 쓰고 책 읽고 영화 보느라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일기 정도는 가볍게 쓰게 되어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러나 전문가들과 비교한다면, 스스로 모자라는 글쓰기에 실망하여 후회와 연민에 밤새워 고민하고, 그동안 죽을 맛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하여 겨우 이정도 습득한 것이 나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기도 하다.
나는 설장구를 들고 깜깜하지만 김삿갓 묘가 내려다보이는 실개천 넓은 바위에 앉았다. 찬 기운이 피부를 파고 들어온다. 사방은 고요하고 산은 말이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어둠은 나를 짓눌러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 앞마당에 글쟁이 선배 후배 선생님들 그리고 교수님들이 모여서 무엇인가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도 어설픈 글쟁이가 되어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잠들어있을 김삿갓을 깨우고 함께 시를 읊조리며 장구를 치고 춤을 추며 한번 어울려 보고 싶었다. 청청한 달빛에 산천의 공기는 싱그럽고 산의 기운이 기분을 들뜨게 한다. 장구통을 어깨에 메고 한번 멋들어지게 설장구 춤을 추었다. 덩실덩실 춤추며 설장구 가락을 치기 시작했다.
다스림에서 휘모리장단을 지나 숫바더듬을하고 오방진으로 대포를 쏘았다. 갈매기 사위로 두손을 너울거리며 후두득 가락을 칠 때 번개 불에 콩을 볶는 소리가 났다. 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듯 흐두득 소리가 나고 장판장에 콩 떨어지듯 개운한 맛이 있었다. 야밤에 도둑고양이 뛰어 다니듯 밤하늘의 별을 이고 멋지게 춤을 추고 있었으나, 아직 저쪽 마당에서는 강의에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시끄러운 설장구 소리에 힐끗힐끗 처다 보는 사람도 있었다.
시를 전공하는 문우가 하나 둘 셋 슬금슬금 오더니 감상을 하며 박수를 쳤다. 달빛도 감동하고 물줄기도 흥겨워서 춤을 추는 듯 했다. 멀리서 김삿갓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산들바람에 산자락이 흔들린다.
아! 드디어 그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인가? 그의 시선을 받고 그의 재능을 조금만이라도 내려 받아 이 황량한 세상에서 홀로 시를 짓고 춤을 추고 설장구를 연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여기 온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그러한 꿈을 꾸고 지나갔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김삿갓이여 ! 오늘밤도 우리와 함께 잘 즐기고 영원한 우리들의 김삿갓으로 남게 되길 바라며 마지막 프로그램에 특별공연으로 설장구를 끝마쳤다.
공연이 끝나자 정말 운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였으며 훌륭하고 보기 드문 전통 공연이었다며 모두 놀라워하였다. 보통 문인들은 딱딱하고 자기의 생각들을 밖으로 내놓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는데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하고 격려를 해서 막걸리를 한잔씩 돌렸다. 마음이 들떠 피곤한 줄 모르고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시를 읊고 나름대로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추억에 남을만한 일들을 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 아침이 되고 말았다.
나는 김삿갓 묘를 새벽에 찾았다. 아침이슬에 젖어있는 묘역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신선함이 남아있었다. 공기는 맑고 깨끗하여 숨을 쉴 때마다 마음이 정화되고 그동안 거짓된 삶에 찌들어 있던 허물을 벗어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였다. 김삿갓 묘에서 공연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나마 공연을 멋들어지게 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흡족했다.
이곳의 추억은 영원히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다. 깜깜한 한밤중 산 속에서 그것도 김삿갓 묘 앞에서의 설장구 춤을 추다니 완전히 환상이었다. 심산유곡의 산의 정령이 전부 깨어나서 함께 즐겼던 요란한 밤이었다. 본인의 인생에서도 깊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데, 산을 전부 벗겨놓은 험한 광경을 보았다. 시멘트 만드는 골채를 만드느라 완전히 산을 한 겹 벗겼다. 놀랍게도 남은 것은 전부 바위뿐이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생각지 못한 광경이었다. 나무가 얼마나 이 지구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 새삼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도담삼봉을 돌아 보았다. 살고 있던 정든 고향집터를 물속에 잠재우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애절함이 묻어있는 그곳에서 자연을 감상하고 또 물 가운데 있는 정자의 아름다음을 찬미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사인암으로 갔다. 단원 김홍도에 의해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한 폭의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신선이 내려앉아 노닐던 곳처럼 말문이 막혔다. 벼락을 맞아 조금 상처가 난 유명한 바위 사인암, 사람이 살고 있는 집 같다고 해서 사인암 이라고도 하고, 고려 때 역동 우탁 선생께서 정사품 벼슬로 청유 하였다는 사연으로, 조선 성종시대 임재광 단양 군수가 사인암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암석이 물속에 비추어 단양 팔경중 제 일경인 사인암을 잊기 어렵겠다. 천상의 선녀가 암벽의 사이사이를 넘나들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사각의 알갱이가 조각조각 떨어질 것 같은 자연의 최고의 걸작 사인암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 기행에서 느낀점은 관광기행과 문학기행은 확실히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사물의 여러 가지 형상을 미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보고 느끼며 문학적 관점으로 열매를 맺게 하려는 큰 수확이 있는 기행이었다. 산천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좀 더 생각보다 높은 표현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이번 기행에 큰 도움을 주신 교수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문우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2003. 봄의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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