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소개

HOME > 이영상설장구 > 박은숙설장구 무용 타악 연구소
  

박은숙설장구 무용 타악 연구소

제목 한복연구가- 그레타리<무대한복> 등록일 2017.10.31 02:28
글쓴이 박은숙 조회 48924

 

‘주몽’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손 한복연구가 그레타 리

“단역 옷까지도 실크에 천연 염색해 전부 수공으로 만들어요”

그는 한복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발굴하는 탐험가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타임머신을 탄 것마냥 시대를 넘나들 수 있다. 한복 연구가 그레타 리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복을 짓는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MBC TV드라마 ‘주몽’의 의상을 모두 그가 제작하고 있다. 전통의 미를 되살리는 그레타 리와 그의 뒤를 잇는 두 아들 인터뷰.

‘주몽’으로 ‘용의 눈물’의 영광을 재현한다
첨부 이미지한복 디자이너 그레타 리(62)는 요즘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주몽’ 출연진들에게 올여름 시원한 모시옷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그는 MBC-TV 드라마 ‘주몽’의 의상을 제작하고 있다. 드라마는 겨울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겨울 의상을 그대로 입고 있다. 연기자들은 더운 여름에 두꺼운 옷을 입고 촬영하려니 고역이란다.

“연기자들이 더워 죽는다고 난리났어요. ‘드라마가 인기가 많으면 뭐 하나. 우리는 더위 먹고 죽는다’고 말이죠(웃음). 이제 곧 인물들이 모시 한복을 입고 나올 거예요. 드라마 일정이 워낙 촉박해서 의상 제작도 서둘러야 해요. 밤새기 일쑤고 휴식이나 여행은 꿈도 못 꾸죠.”

의상 한 벌을 불과 3일 전에 요청하는 경우도 있단다. 그렇지만 드라마 반응이 좋아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가볍다고 한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에게 옷에 대한 칭찬을 많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극에서 화려한 의상은 포기할 수 없는 눈요기가 아닌가.

“옷이 예쁘면 배우들도 예뻐 보이고, 그러면 드라마가 잘되지 않겠어요? 저는 아무리 작은 배역의 옷일지라도 모두 비단을 씁니다. 그리고 직접 천연 염색을 하구요. 시중의 옷감을 뚝 잘라서 옷을 지으면 고급스러운 색이 안 나와요.”

그는 총 4백여 벌의 의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이번 드라마 의상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디테일이다. 한복은 안에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맵시가 달라 배우들의 속옷까지 정확히 맞춰준다.

“한복은 깃이나 디테일한 면에서 그 수준이 결정됩니다. 깃 하나에 옷의 고급스러움이 드러나죠. 그리고 속옷을 잘 입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서노’의 의상은 깃 안에 속옷이 두 겹으로 착 감겨 있는 걸 볼 수 있죠. 만약 아무것도 없이 저고리 하나만 덜렁 입었다고 생각해봐요. 아주 보기 싫죠.”

그가 주안점을 둔 다른 하나는 색상이다. 요즘 ‘주몽’의 의상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바로 색 이야기. ‘주몽’의 인물 성격을 색에 빗댈 만큼 각기 다른 컬러풀한 색에 신경을 써 디자인했고, 그는 의뢰된 색상을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TV에 나올 옷감 색은 원색에서 벗어나야 해요. 빨간 한복을 그냥 입고 나왔다간 화면에 불이 나겠죠. 보여주고 싶은 색의 톤을 50% 다운해서 작업해야 화면에서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이런 노하우는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비롯된다. 그는 서라벌예고를 거쳐 서라벌예대(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의상과 공연을 접하며 쌓인 여러 가지 데이터가 그의 눈과 손끝에 저장돼 있다. ‘주몽’의 고풍스런 의상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주몽’ 출연진 중에서 한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인물은 ‘유화부인’, 오연수씨예요. 원래 오연수씨가 한복이 굉장히 잘 어울려서 전에도 저와 사진 작업을 몇 번 했어요. 반대로 가장 걱정스러웠던 사람은 ‘소서노’의 한혜진이었죠. 서구적으로 생겨서 한복이 어울릴지 걱정이었죠. 근데 입은 모습을 보니 캐릭터에 맞게 강한 느낌도 나고 괜찮더라구요.”

첨부 이미지그의 드라마 의상 제작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80년대 MBC 연속극 ‘황진이’와 KBS-TV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한복도 그레타 리의 작품이다. 특히 ‘용의 눈물’은 의상 제작으로 가장 큰 호평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시청자들이 작품보다 의상에 더 관심을 보여 연기자들이 고민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정갈하고 깔끔한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고급스러운 금직 문양(기존의 금박이 아닌 금실로 짜 넣은 무늬)은 한복의 아름다움을 새삼 사람들에게 확인시켰다. 이제 ‘주몽’에서 다시 한번 그날의 영광을 재현할 생각이다.

그레타 리의 꿈, 가업을 잇는 두 아들
Greta Lee Since 1967.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시작한 한복 디자인이 이제 40년이 되어간다. 연극영화를 전공했지만 군 제대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더 공부할 여건이 안 돼 고민하던 중 우연히 세종대에서 했던 고종황제 패션쇼를 보게 됐다. 그 후 그는 한복의 우아함에 감동을 받아 궁중 의상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대 의상을 해보고 싶었는데 범위가 좁다는 걸 느끼고 한복으로 눈을 돌렸지요. 그때부터 우리나라 전통 복식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당시는 한복 디자이너라는 개념도 없을 때였다. 게다가 남자가 옷을 만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처음 4~5년간은 친구들에게 직업도 얘기 못했어요. 창피해서(웃음). 지금도 그래요. 남자가 한복을 만든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그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복식 관련 서적이나 자료가 전혀 없었다는 것. 게다가 옷 박물관도 없어 막 문을 연 창덕궁과 세종대 박물관 두 군데를 다니며 공부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못다 이룬 영화의 꿈은 아쉬웠다. 아직도 신문을 보면 제일 먼저 펼쳐보는 게 영화 프로그램 편성표다.

“전공했던 걸 바탕으로 대학에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드라마 의상 제작에도 도움이 되니 큰 후회는 하지 않아요. 단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미련으로 남지요.”

두 아들 윤민(32), 문재씨(29)도 각각 영문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한복 연구가의 길을 걷고 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섬세한 작업을 봐왔기에 자연스럽게 이 분야로 들어서게 됐다고.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일이라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몰랐던 어려움들이 참 많더군요. 아버지처럼 더 열심히 연구에 매진해야지요.”(이윤민)

첨부 이미지“아버지는 일하실 때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세요. 당시는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지만 완성 후에 알게 되죠. ‘아~ 이래서 아버지가 엄격하게 하셨구나.’라구요.”(이문재)

그레타 리는 현재 경희대, 한성대, 중앙대, 한체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또 국내외에서 그의 패션쇼를 요청하는 곳이 많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이때 두 아들이 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착착 일을 진행하니 여간 든든한 협력자가 아니다.

전세계를 한복 저고리로 덮을 그날까지
한복은 참 어려운 옷이다. 양장보다 더욱 정확한 치수를 요구한다. 양장은 기성복처럼 얼추 맞으면 입을 수 있지만 한복은 조금만 어긋나도 저고리가 들린다. 한복은 작은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예민한 작업이다. 또한 어울리는 체형도 따로 있다.

“키가 크면 한복이 안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미스코리아들은 한복 맵시가 안 나요. 한복 모델 구하기가 더 힘든 이유예요. 저는 170cm 이하 체형만 한복을 입히는데 모델 에이전시에는 한복 모델이란 자체가 없을 뿐더러 조건에 맞는 모델을 찾기도 어렵죠.”

한복 패션쇼를 여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한복 디자인을 20~30년 동안 하면서도 발표회 한 번 못해본 사람이 대부분이다. 양장보다 대중성이 떨어져 지원이나 투자도 받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레타 리는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등 무대 의상을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인지도를 높였고, 이제는 그가 주최한 패션쇼만 해도 국내외 통틀어 1백여 회가 넘는다. 그야말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그가 손도 대보지 못한 형태의 한복이 아직 많단다.

“한복은 정말 어려워요. 저도 아직 다 모르는걸요. 조선 초·중·말기 다르고 고구려·백제·신라 옷, 또 신랑·신부·아기 돌복 등 내가 평생 다 알고 가기 힘들 정도로 우리 옷의 종류는 다양해요. 그래서 매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가 해외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창작력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다재다능함. 여건이 좋지 않은 해외 무대에서는 그가 분장사도 되고 때로는 헤어 스타일리스트도 된다. 경희대에서 무대 메이크업을 가르칠 정도로 분장과 헤어 손질 실력도 전문가 이상이다.

“완벽하지 않으면 쇼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해외의 어느 패션쇼에서 청바지 위에 한복을 입힌 경우도 있더라구요. 그런 쇼는 되레 욕만 먹어요. 안 하느니만 못하죠.”
첨부 이미지

그가 최근 연 패션쇼를 일례로 들었다. ‘한불 수교 1백20주년’으로 초청되어 파리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그는 패션의 본고장에서 우리 한복을 세운다는 자부심에 철저히 준비해 프랑스로 날아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가져간 1백 벌의 옷에 반도 보여주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옷을 1백 벌을 준비했는데 현지에 가보니 모델을 고작 4명 섭외한 거예요. 간신히 열 명 정도 구해 첫날은 궁중 예복을 진행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관계자가 아는 집안 딸을 모델로 데려온다는 겁니다. 화가 나서 그만두자고 소리를 질렀죠.”

패션쇼는 예술이다. 당연히 전문 모델이 옷을 입고 옷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표현해야 한다. 친분으로 얽힌 동네 바자회가 아니다. 그는 결국 쇼는 10분 만에 끝났다. 이 패션쇼를 위해 옷 1백 벌을 전부 새로 지었는데 말이다.

“저는 해외 갈 때 무조건 새 옷을 가져가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아무리 해외라지만 그들도 한 번 본건 금방 식상해요. 패션쇼는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결국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주최 측이 미안한 지 올 10월에 정식으로 초청해서 극장을 빌려 패션쇼를 해보자고 제의하더군요.”

그는 이미 10월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의 대사관 취임행사 파티 및 해외 행사가 두 개나 잡힌 상태. 그는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한 번씩 패션쇼를 해왔다. 이렇게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한번은 러시아에 쇼를 하러 갔는데 모델들 키가 모두 180cm인 거예요(웃음). 한복을 입혔더니 무릎에서 끊기는 스커트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모델 키가 너무 크다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초등학생을 데려왔어요. 해외는 이렇게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아요.”

반면에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인상 깊은 쇼도 많았다. 우리나라와 수교 전일 때 다녀온 모스크바 교포들을 위한 자리와 적십자 회담 때 북한에서 한 공연이었다.

“모스크바의 한국 교포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한복을 제 쇼에서 처음 봤다며 감탄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니 잊고 있던 그들의 조국을 제가 옷으로나마 보여줄 수 있어 기뻤어요. 그리고 또 한 번은 1985년 남북 적십자 회담 때 북한에서 한 쇼입니다. 가슴 뭉클했던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불모지에서 싹을 틔우듯 한복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그레타 리. 그는 오늘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쉼 없이 옷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같은 길을 가는 두 아들도 함께라 더욱 든든하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박형주·그레타 리 한복

레이디경향, 2006년 7월호

 

----------------------------------------------------------------------------

^^

밤에 잠이안와서 뒤적이다가;

주몽 저도 진짜 좋아해요 ~~>_<

 

출처
http://blog.naver.com/codesss?Redirect=Log&logNo=50006799051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
이전글 | 박은숙설장구